연중 제 1 주간 수요일 2009. 1. 14.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갔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마르 1,29~39)
오늘의 묵상
학습 심리학의 이론 가운데 ‘관찰 학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이론은 인간의 학습은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단순한 관찰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인간의 행동은 다른 사람이 경험하는 바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그 영향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 상을 받게 되면
‘나도 그 행동을 해서 상을 받아야지.’ 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다른 사람의 행동이 벌을 받게 되면 ‘나도 그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는 실제로 내가 상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곧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고 단순한 관찰만으로도
자연스럽게 학습이 이루어진 결과라고 보는 것입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가 당신의 삶을 관찰학습을
할 수 있게 배려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우리 인간과 똑같은 처지로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셔야만 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 인간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예수님이시기에
그분의 삶을 닮을 수 있는 기본적 힘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관찰과 묵상)만으로도
그분의 삶을 따라 살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모든 것을 버리시고 사람이 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께 마음을 모아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올려야 하겠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라
-박기호 신부-
밀려드는 병자와 마귀 들린 자들을 긍휼히 맞으시고
치유와 구마의 자비를 연일토록 베푸심에 얼마나 피곤하셨을까요?
그럼에도 여명이 밝기 전 일어나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스승 예수님은 하루를 그렇게 시작하셨습니다.
고대 종교사회에서는 아직 캄캄할 때 일어나 태양이 떠오르도록 치성 드리고,
저녁놀을 향해 감사의 예를 드리는 것이 제사장의 임무였습니다.
하루를 열고 닫는 임무는 오늘도 종교인들을 통해 전승됩니다.
범종을 치면서 삼라만상을 깨워 여명을 맞이하고 저녁이면 보금자리에 들게 합니다.
사제, 수도자는 물론 가장들도 새벽 기상으로 자신과 가족과 공동체의
평화 강령을 기원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루 첫 새벽을 주님께 봉헌하며
청정기운을 받음으로 온종일을 활력 차게 만들어야 합니다.
종교인이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그날의 해가 빛을 잃습니다.
자녀들을 일찍 깨우는 일은 가장 중요한 교육입니다.
등교와 출근 때문만이 아니고 인간이 대자연의 질서에 결합하여
천지간 영적인 교류 속에 영성적으로 살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본당 수도원마다 새벽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본당에 새벽 미사가 사라지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주부들이 오전 미사에 보다 많이 올 수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종교예식이란 다수의 편의보다
변함없는 시간과 거룩한 공간의 옹호가 더 중요한 건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