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6주간 토요일 2009. 2. 21.
그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학자들은 어째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과 멸시를 받으리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느냐?
사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엘리야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 (마르 9,2~13)
아름다운 모습
-이정호신부-
가끔 임종을 앞둔 분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분들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 참으로 아름답게 살다가셨구나
또는 돌아가실 때조차 힘겹게 가시는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죽음은 죽음을 맞이하는 한순간만의 일이 아니라 평생을 살면서
우리가 크고 작은 선행과 기도로 이루어가는 결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분은 표정이 없다고들 합니다.
얼굴의 근육이 모두 풀려서 표정을 짓지 못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평생을 선하게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가신 분들은
참으로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시고
반면에 후회와 분노 속에서 살아가셨던 분들은
여전히 그 굴레에 매여 얼굴 표정에 그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죽음을 넘어서서 온 삶을 다해 사랑하셨던 예수님은
그 사랑의 뜨거운 열망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빛나고 새하얀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시고
세상의 어떤 굴레도, 죽음도 그분을 막지 못한 채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가리움 없이 보여주십니다.
우리도 같은 모습으로 불리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시듯이 말입니다.
빛나는 얼굴,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랑하며 살다가
예수님처럼 그렇게 하느님께로 돌아갔으면 합니다.
내 안에 드리워진 빛나고 아름다운 모습에 걸맞게 살기를 갈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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